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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우정의 그림자, 질투와 동경, 시간의 무게, 마지막 동행

by 짧은 글의 단락 2025. 12. 8.

은중과 상연 포스터

2025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은중과 상연은 어린 시절 우정으로 시작된 두 여성의 관계가 세월과 선택, 감정의 뒤틀림 속에서 어디로 향할 수 있는지를 깊고 현실적으로 탐구하는 드라마입니다.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 오해처럼 지나간 감정, 그리고 용서하지도 끊어내지도 못한 기억이 인물들의 인생 전반을 뒤흔들며, 우정과 질투, 동경과 미련이 뒤엉킨 복합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그립니다. 이 작품은 멜로나 자극적인 관계 갈등이 아닌, 사람이 사람을 오래 바라볼 때 피할 수 없는 모순과 연약함을 중심에 두고, ‘관계’라는 감정의 내장을 드러내듯 천천히 헤집어 보여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건 단순한 이별이나 화해가 아니라, 감정의 깊이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무게’입니다.

우정의 시작과 그림자

두 주인공 은중과 상연의 관계는 어린 시절 한적한 동네에서 시작됩니다. 상연은 밝고 매력적이며 사랑받는 아이였고, 은중은 그녀가 빛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동경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마음속에 스며든 작은 감정의 씨앗은 성장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건과 감정의 상처로 증식하며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드라마는 이 과정을 자극적인 사건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느꼈을 법한 미묘한 감정 — ‘나는 왜 저렇게 될 수 없었을까’, ‘왜 나는 선택받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 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우정은 안전하고 따뜻해야 한다는 통념 속에서, 이 작품은 우정 또한 질투와 비교, 동경과 억눌린 감정이 존재하는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상연이 가진 빛이 은중에게는 상처가 되고, 은중이 보였던 집착과 거리두기가 상연에게는 상처가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시청자는 그 감정을 단정할 수 없게 됩니다. 우정은 때로 가장 가까운 감정이지만, 가장 멀어지고 싶은 감정이기도 합니다.

질투와 동경, 멀어지는 시간

성인이 된 후 두 사람은 다른 도시, 다른 삶, 다른 선택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지만 관계의 끈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성공으로만 보이던 상연의 삶에는 불안과 공허가 존재했고, 은중은 그 공허를 ‘선택받은 삶을 사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로 오해합니다. 반대로 은중의 결핍과 고단함을 상연은 연민과 미안함으로 바라보지만 그 감정 역시 상대에겐 또 다른 상처가 됩니다.
이 드라마가 탁월한 지점은 갈등이 폭발하거나 배신이 터지는 방식으로 관계를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상의 대화, 연락의 간격, 사소한 침묵, 표정의 미세한 변화가 두 사람 사이의 쌓인 감정을 보여주는 재료가 됩니다. 시간이라는 흐름은 관계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더 멀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감정은 ‘좋아한다’와 ‘미워한다’ 사이가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계속 머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감정선은 현실적이고 아프게 다가옵니다.

마지막 동행: 후회와 회한 그리고 용서

극의 후반부, 상연이 자신의 병을 고백하며 은중에게 마지막 동행을 제안하는 순간 이 작품은 정점을 맞습니다. 이 여정은 단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과거를 마주하고 감정을 한 겹씩 벗겨내는 통과의례와 같습니다. 상연은 자신 말고는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부탁을 은중에게 합니다. 그 부탁은 관계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에 가깝습니다.
두 사람은 과거의 오해, 잘못된 판단, 의도치 않은 상처를 하나씩 꺼내놓으며 감정을 정리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는 용서가 감정의 소멸이 아니라,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반드시 이해해야만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잊어야만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마지막 동행은 우정의 증명이라기보다 후회의 마무리이며, 미련의 해소이며, 삶에서 가장 용기 있는 선택 중 하나입니다.

관계의 민낯과 남겨진 질문

은중과 상연이 남기는 울림은 단순한 감정 소비가 아니라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는 과거의 상처를 진짜로 극복했을까? 사랑과 우정, 질투와 동경, 연민과 미움은 별개의 감정일까? 작품은 이 감정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 한 관계 안에서 섞이고 충돌하며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시청자는 어느 한 사람만을 응원할 수 없고 어느 한 사람만을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감정은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으며,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결말 이후에도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들며, 우리가 품고 있는 관계들에 대한 해답 없는 질문을 남깁니다.